2026년 10월 30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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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화·체육의성읍

의성 지역 교회의 백년 내력, 초가 사랑방에서 일군 신앙의 터전

1902년 비봉교회 설립부터 일제 탄압과 전란을 딛고 군민 십분의 일을 품기까지

의성 지역에서 개신교의 역사가 싹을 틔운 곳은 의성읍 비봉리의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에 살던 김수영은 1893년 봄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 장터에 나갔다가 선교사 배어드가 길거리에서 펼친 노방 전도를 듣고 깊은 감화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의성 지역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된 김수영은 1900년 고향 비봉리로 돌아와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그의 열성적인 전도에 힘입어 하나둘 교인들이 모여들었다. 개신교가 처음 들어왔던 무렵에는 신도 수가 워낙 적었던 탓에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의 집 사랑방을 기도처로 정해 모이거나 집집을 번갈아 찾아다니며 예배를 올렸다. 좁디좁은 사랑방 안에서 갓을 머리에 쓴 신도들이 옹기종기 둘러앉다 보니 서로의 이마와 눈이 갓 모서리에 찔리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그럴 때마다 터져 나온 웃음은 엄숙했던 집회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며 신도 간의 유대를 한층 돈독하게 묶어 주었다.

신앙공동체가 점차 넓어지면서 예배 공간에 대한 갈증도 깊어졌다. 초기에는 마땅한 집회 처소가 없어 교인들이 모이는 옆 동네로 발걸음을 옮기거나 십 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예배당을 찾아가는 수고를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먼 길을 오가는 불편을 견딜 수는 없었기에, 같은 마을 교인들은 헌금을 십시일반 모으고 선교사들의 지원을 받아 자체적인 기도처와 예배 처소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탄생한 의성 최초의 교회는 1902년 초가 4칸으로 세워진 비봉 교회였다. 이듬해인 1903년에는 지역 내 두 번째 교회로 쌍계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남녀가 한자리에서 예배를 보지 않도록 초가를 기역자 형태로 꺾어 지은 독특한 구조를 취했다. 이후 교세가 가파르게 성장하면서 교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붕에 흙기와를 올리거나 번듯한 목조 건물로 예배당을 넓혀 짓는 흐름이 이어졌다. 1908년 초가 3칸의 소박한 기도소로 출발했던 의성 교회는 불과 5년이 지난 1913년에 기와집 30칸 규모의 널찍한 예배당을 증축할 정도로 교세가 급격히 불어났다.

순탄하게 교세를 넓혀 가던 의성의 개신교계는 1930년대에 접어들며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부딪혀 큰 시련을 겪었다. 일제는 이른바 1면 1교회 정책을 앞세워 덕지 교회, 의성 교회, 양서 교회 등 수많은 교회를 강제로 문 닫게 만들었다. 탄압은 단순한 폐쇄에 그치지 않고 예배당 건물을 뜯어 팔아 침략 전쟁의 자금으로 전용하는 만행으로 이어졌다. 1942년에는 일본 경찰이 대사 교회의 목조 예배당을 완전히 해체하여 안평 경방단 본부 건물로 삼았으며, 박곡 교회와 창길 교회의 예배당은 교인들의 손에서 빼앗겨 면사무소 양곡 창고로 전락했다. 현리 교회에서는 일제가 강제로 건물을 헐어가려 하자 교인들이 끝까지 맞서 저항하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스스로 손으로 예배당을 철거하는 비극을 겪었다. 터전을 잃은 신도들은 문을 연 교회를 찾아 먼 길을 떠돌아야 했고, 성경과 찬송가마저 압수당한 채 집 안에서 올리는 가정 예배까지 금지당하며 칠흑 같은 암흑기를 견뎠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교회들은 흩어졌던 신도들을 다시 모으고 부서진 예배당을 새로 올리며 재건의 발판을 다졌다. 그러나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은 또다시 의성 지역 교회들을 큰 파괴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특히 전쟁 당시 갈 곳 없는 피난민들에게 안식처를 내어주었던 의성 교회는 격렬한 공중 폭격으로 인해 예배당 건물 전체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극심한 전화 속에서도 기적처럼 참화를 비껴간 곳도 있었다. 사곡면 매곡리에 자리한 매곡 교회는 험준하고 깊숙한 산골짜기에 터를 잡은 덕분에 인민군의 침입을 받지 않았고, 의성읍 원당리의 구세군 원당 영문은 마을 전체가 맹렬한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되는 와중에도 유독 예배당이 서 있던 자리만은 피해를 입지 않고 온전히 보존되었다.

전쟁으로 삶의 터전과 예배당을 동시에 잃은 교인들은 스스로 바친 헌금과 외국 선교부의 원조를 한데 모아 다시금 예배당을 일으켜 세웠다. 전후 수습기를 거쳐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의성의 개신교는 예배당과 교인 수 모두에서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렸다. 이 과정에는 교단 분립이라는 아픈 진통도 함께 얽혀 있었다. 1959년 한국 장로교 교단이 세계 교회 협의회(WCC) 가입 찬반 문제를 둘러싸고 둘로 갈라지면서, 장로교세가 주류를 이루던 의성에서도 하나의 교회가 갈라져 한 동네에 두 교회가 나란히 마주 서는 일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핍박과 6·25 전쟁, 교단 분열이라는 겹겹의 위기 속에서도 복음을 찾는 발길은 줄지 않았고, 1960년대에 접어들며 지역 교계는 전성기를 맞았다. 모교회에서 신도가 급증하자 1967년 고현 교회가 갈라져 나왔고, 1973년에는 금오 교회가 독립하는 등 자연스러운 분립이 이어졌다. 늘어나는 신도를 맞이하고자 예배당을 현대적 건축물로 다시 짓는 한편, 교역자 사택과 신앙 교육관을 차례로 들이며 현대적인 교회의 틀을 갖추어 나갔다.

디지털의성문화대전에 기록된 2012년 현황을 살펴보면 의성 지역에는 모두 11개 교단에 걸쳐 165곳의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교단별로는 장로교가 119곳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대한 예수교 장로회 경안 노회 소속이 30곳, 안식교 5곳, 구세군 4곳, 침례교 2곳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외에도 감리교, 성결교, 여호와의 증인, 통일교, 통합 교회가 각각 1곳씩 분포해 있으며, 기독교 신자 수는 총 5,907명으로 당시 의성 전체 군민의 10퍼센트에 이르렀다. 수백 명의 신도가 모이는 큰 교회들은 번듯한 예배당 곁에 사택과 교육관, 식당과 주차 시설을 완비하고 있으며, 시골 마을 어귀에 호젓하게 자리 잡은 아담한 교회들은 초창기 비봉리의 사랑방처럼 주민들의 포근한 쉼터가 되어 주고 있다. 나아가 오늘날 의성의 교회들은 부속 유치원과 무료 아동 센터를 개설하여 돌봄을 책임지고 도서관과 휴게실을 주민들에게 개방하는 등, 닫힌 종교 집회소를 넘어 지역 사회를 묵묵히 떠받치는 봉사의 보금자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기사에 나오는 것

읍면
의성읍사곡면안평면
기관·단체
비봉 교회쌍계 교회의성 교회덕지 교회양서 교회대사 교회박곡 교회창길 교회현리 교회매곡 교회구세군 원당 영문고현 교회금오 교회대한 예수교 장로회 경안 노회
사업·정책
의성의 내력
쟁점
교회김수영사랑방 예배1면 1교회세계 교회 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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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참고 보도

  1. 디지털의성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 교회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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