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30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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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산 자락에 터 잡았던 조문국, 신라의 군현으로 편입된 옛 자취

삼한 소국에서 출발해 군사 거점과 문소군으로 이어진 의성 고대사의 흐름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일대에는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인 넓은 분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이곳 구릉지에는 옛 지배층의 위세를 짐작하게 하는 고총 고분들이 늘어서 있다. 의성의 고대사는 삼한 시대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조문국(召文國)에서 출발하는데, 문헌 기록과 발굴된 유적들은 이 금성면 일대를 조문국의 중심 무대로 지목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서는 고려 시대에 의성부(義城府)라 불린 문소군(聞韶郡)이 본래 조문국이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고려사(高麗史)』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역시 의성을 조문국의 터로 비정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를 비롯한 읍지(邑誌)들에서도 의성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금성면 일대를 조문국의 중심지로 기록하고 있어 옛 문헌들의 서술이 한곳을 가리킨다.

의성 지역 선사 유적의 분포를 살펴보면 낙동강과 위천이 만나는 서부 지역, 동남쪽의 쌍계천 유역, 그리고 북부 미천 유역의 3대 하천 유역 구릉으로 크게 구분된다. 이들 구릉지에는 고인돌과 성곽이 집중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주변에 100여 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어, 고인돌을 남긴 세 집단이 초기 소국 형성기에 주요 정치 집단으로 성장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가운데 문헌 기록과 맞물려 금성면의 탑리리, 대리리, 학미리 일대에 거대한 고총 고분을 남긴 세력이 가장 두드러진 정치 집단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조문국을 이루었던 세력으로 파악된다. 『삼국지(三國志)』가 전하는 3세기 경상도 지역의 변한과 진한 각 12개 소국, 그리고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소국들은 주변 세력과의 치열한 경쟁을 거치며 지배 체제를 정비해 나갔는데 조문국 역시 그러한 흐름 속에서 성장하였다.

조문국의 중심지였던 금성면 일대의 고분들은 의성 전역의 다른 무덤들에 비해 그 규모가 월등히 크다. 특히 탑리리에는 봉분의 지름이 20미터를 넘어서는 고분이 16기나 자리하고 있으며, 가장 큰 무덤은 동서 41미터, 남북 30미터에 높이가 8미터에 달할 만큼 웅장한 대형분이다. 탑리리 고분에서는 공작새의 날개 모양을 띤 세 개의 입식(立飾)을 갖춘 금동관이 출토되어, 이곳이 의성 지역을 다스리던 유력 지배층의 무덤이었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금성면 일대는 동쪽으로 뻗어 내린 태백산맥 지맥들로 인해 북쪽의 안동 및 영주, 남쪽의 영천 지역과 수십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고립된 분지를 이루었기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에 유리했다. 전조문국 경덕왕릉(傳召文國 景德王陵)과 주변 고총 고분들이 신라의 영향을 일부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양상으로 축조된 점은 이러한 지형적 배경 속에서 자율적인 세력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력을 확장하던 사로국(斯盧國)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는 벌휴왕 2년인 185년 2월, 파진찬 구도(仇道)와 일길찬 구수혜(仇須兮)를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벌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2세기 말 국읍 중심의 내부 결합을 굳히고 군대 조직을 정비한 사로국이 낙동강 상류로 진출하면서 조문국을 정벌한 것인데, 당시의 침공은 완전한 영토 병합이라기보다는 거점 확보나 공납 의무를 지우는 불완전한 지배 형태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문국이 언제까지 독자성을 띠며 존속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525년(법흥왕 12) 2월 신라가 지금의 상주 지역인 사벌주에 군주를 배치하면서 통치권을 강화하던 무렵에는 신라에 완전히 복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는 금관가야나 대가야를 병합한 뒤 그 국명을 행정구역 이름으로 삼았던 전례처럼, 조문국을 멸망시킨 뒤 지방으로 편제하면서 조문군(召文郡)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으로 해석된다. 673년(문무왕 13) 9월에 축조된 조문성(召文城) 역시 당시 조문군의 명칭을 따른 것으로 추정되며 1864년 간행된 『대동지지』에도 조문국이 망하고 조문군이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조문국 복속과 더불어 의성 지역의 전략적 관리를 본격화하였다. 514년(지증왕 15) 1월에는 지금의 안계면 일대이자 당시 아시혜현이었던 아시촌(阿尸村)에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안계면 일대는 당시 의성의 중심지가 아니었으며 강력한 재지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곳으로, 신라는 이곳에 왕경 6부와 남쪽 지방민들을 이주시켰다. 이는 의성의 유력 재지 세력과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면서도 그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상주나 영주를 거쳐 소백산맥 이북으로 나아가는 군사적 요충지를 중앙정부가 장악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삼국통일 이후 757년(경덕왕 16) 12월에 이르러 국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전국을 9주로 개편하고 군현의 이름을 한식(漢式)으로 바꾸는 작업이 단행되었다. 이때 의성의 조문군은 문소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상주에 예속되었다. 문소군은 진보현(지금의 청송군 진보면), 비옥현(지금의 비안면), 안현현(지금의 안계면), 단밀현(지금의 단밀면) 등 4개 현을 영현으로 거느리는 상위 행정 단위가 되었다. 한편 지금의 다인면에 해당하는 다인현은 상주의 직할 현이 되었고, 지금의 옥산면인 일계현과 단촌면인 고구현은 지금의 안동인 고창군에 속박되었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의성의 중심지는 의성읍에 자리 잡게 되었으나, 통일 신라 시대까지 의성의 중심은 여전히 금성면 일대였다. 중심지가 언제 의성읍으로 옮겨갔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문군이 문소군으로 개칭되면서 군의 치소가 옮겨졌을 가능성 또한 제기되고 있다. 오늘날 금성면 일대에 흩어져 있는 대형 고분들과 탑리리 고분의 금동관은 신라의 군현으로 통합되기 이전, 이 땅에서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조문국의 내력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 기사에 나오는 것

읍면
금성면의성읍안계면비안면단밀면다인면옥산면단촌면
사업·정책
의성의 내력
쟁점
조문국금성면 고분군탑리리 고분문소군아시촌 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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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참고 보도

  1. 디지털의성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 고대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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