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성 3·1 운동, 12개 나들목을 흔든 19번의 만세 함성

*비안 보통학교 언덕에서 도리원 장터까지 들불처럼 번진 군민들의 자주독립 투쟁*

**발행:** 2026년 9월 7일  
**기자:** 오늘 의성 뉴스룸  
**섹션:** 사회·교육·복지  
**유형:** 해설  
**확인 수준:** 1차 자료 확인  
**원문 주소:** https://uiseongtoday.kr/society/%EC%9D%98%EC%84%B1-3-1-%EC%9A%B4%EB%8F%99-12%EA%B0%9C-%EB%82%98%EB%93%A4%EB%AA%A9%EC%9D%84-%ED%9D%94%EB%93%A0-19%EB%B2%88%EC%9D%98-%EB%A7%8C%EC%84%B8-464  
**발행처:** 오늘 의성 (https://uiseongtoda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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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심 요약

- 1919년 3월 일제의 억압을 뚫고 터져 나온 자주독립의 외침은 의성 땅 곳곳의 산간 마을과 장터를 거세게 흔들었다.

1919년 3월 일제의 억압을 뚫고 터져 나온 자주독립의 외침은 의성 땅 곳곳의 산간 마을과 장터를 거세게 흔들었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 아래에서 이른바 충량한 신민의 양성을 내세운 억압적인 통치와 가혹한 경제적 수탈로 커다란 고통을 겪던 무렵 일어난 3·1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일어난 러시아 혁명과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이라는 세계사적 격변 속에서 민족의 자주와 평화를 되찾고자 분출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의성 지역에서도 이러한 국내외 정세의 흐름을 타고 3월 12일부터 4월 초순에 이르기까지 군내 열두 곳에서 모두 열아홉 차례에 걸쳐 뜨거운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의성 지역 독립 만세의 첫 횃불은 비안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의 손에서 피어올랐다. 이 학교 상급생이던 박만녕(朴萬寧)은 3월 9일부터 동맹 휴학과 만세 시위를 위한 준비를 치밀하게 진행하였고, 3월 11일 전교생을 불러 모은 뒤 수업이 끝나면 비안 장터로 나아가 만세를 부르자고 뜻을 모았다. 하지만 학교의 일본인 교장이 비안 주재소 경찰에 이 사실을 알리면서 경계망이 좁혀오자 계획을 이튿날로 미루어야 했다. 결국 3월 12일 오전 10시 30분 무렵, 등교를 마친 학생들은 학교 뒤편 언덕으로 올라가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목청껏 독립 만세를 외치며 지역 시위의 첫 문을 열었다.

학생들의 용기는 곧장 이웃 마을의 주민과 종교인들에게 퍼져나갔다. 3월 13일 안평면 괴산동에서는 교회 신도들이 마련한 시위에 쌍계동 주민들이 대거 합세하면서 기세를 올렸고, 이 일로 17명이 법정에 넘겨져 박영화가 징역 1년 6개월을, 다른 참여자들이 10개월에서 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같은 날 비안면 동부동과 서부동 주민 100여 명 역시 우곡 시장으로 몰려나와 만세를 불렀으며, 사흘 뒤인 3월 16일에도 같은 자리에서 다시금 시위를 일으켰다. 두 차례의 우곡 시장 만세 운동으로 김석근, 임재호, 박후도, 박홍섭이 징역 10개월을 선고받는 등 스물두 명이 재판을 받았다. 아울러 3월 16일 밤에는 비안 장터 북서쪽 이두동과 장춘동에서 소년들이 어둠을 틈타 거리에 나서며 만세 소리를 드높였다.

종교인과 농민들이 힘을 모은 만세 운동은 안평면 일대에서 더욱 거세졌다. 안평면 대사동에서는 교회 신도들을 주축으로 삼아 3월 15일부터 3월 19일까지 무려 다섯 번에 걸쳐 시위가 연속으로 전개되었다. 교회의 주요 간부들이 대열을 이끌고 지역 농민들이 호응하여 3월 17일과 19일에는 시위 인원이 4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서른다섯 명이 일제의 재판에 넘겨졌으며, 이종출과 이옥돈은 징역 1년 6개월, 이만준과 이배기는 징역 1년을 각각 선고받았고 나머지 사람들도 10개월에서 4개월에 이르는 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봉양면 사고동에서는 지역 유림들이 일어나 3월 17일과 18일 이틀 동안 만세 운동을 이끌었으며, 이복구와 이종광, 이종순 세 사람이 일제 법정에 불려가 나란히 징역 6개월을 치러야 했다.

만세 운동의 열기는 장날을 맞아 더욱 거센 충돌로 치달았다. 3월 18일 의성 장터에서는 금성면 대리동의 교회 간부들이 사전에 준비한 만세 시위가 펼쳐져 열두 명이 재판에 넘겨졌고, 주모자인 박낙현이 징역 1년 6개월, 윤영주와 오상룡, 윤용구가 징역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튿날인 3월 19일에는 교통 요지였던 봉양면 도리원에서 군내 최대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장터에 모인 1,000여 명이 넘는 군중이 도리원 주재소를 에워싸고 시위를 벌이자, 일본 경찰과 헌병대는 군중을 향해 실탄을 난사했다. 이에 시위대가 돌을 던지며 거세게 맞서면서 군내에서 유일한 유혈 충돌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권해운이 목숨을 잃고 여섯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김유식, 김도식, 권사연이 징역 2년을 받는 등 26명이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피 흘린 참극 뒤에도 의성 사람들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3월 19일 밤 점곡면 주재소 앞에서도 시위 군중을 향한 일제의 총탄 발포가 일어났고, 주민들은 굴하지 않고 3월 20일 밤에 재차 모여 시위를 이어가 스무여 명이 법정에 섰다. 3월 25일에는 신평면 덕봉동과 중률동의 기독교인 50여 명이 점곡면 사무소 앞에 모여 만세를 부른 뒤 주재소를 향해 행진하다 열두 명이 붙잡혀 여덟 명이 징역 4개월을 받았다. 마지막 거사는 4월 초순 춘산면 금오동에서 추진되었으나, 시위 격문을 돌리던 중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안타깝게도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3월 12일부터 4월 초순까지 이어진 의성 지역의 3·1 운동은 일제 경찰의 주재소 한 곳을 파손시키고 두 차례에 걸친 발포로 시위자 한 명이 순국하고 여섯 명이 다치는 치열한 싸움이었다. 이 과정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정식 재판에 넘겨진 군민의 수만 148명에 달했다. 이 거센 함성은 전 민족적 독립운동의 불씨를 더욱 댕겼으며,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공화정 정착으로 나아가는 굳건한 디딤돌이 되었다.

## 이 기사에 나오는 것

- **기관·단체:** 비안 공립 보통학교, 비안 주재소, 도리원 주재소, 점곡면 주재소, 점곡면 사무소
- **읍면:** 비안면, 안평면, 봉양면, 금성면, 점곡면, 신평면, 춘산면
- **사업·정책:** 의성의 내력
- **쟁점:** 3·1 운동, 도리원 만세 시위, 박만녕, 권해운, 비안 공립 보통학교

## 원문 자료

1. 디지털의성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 3·1 운동 <http://uiseong.grandculture.net/uiseong/toc/GC05200477> (202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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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표기: 오늘 의성, 「의성 3·1 운동, 12개 나들목을 흔든 19번의 만세 함성」, 2026년 9월 7일. https://uiseongtoday.kr/society/%EC%9D%98%EC%84%B1-3-1-%EC%9A%B4%EB%8F%99-12%EA%B0%9C-%EB%82%98%EB%93%A4%EB%AA%A9%EC%9D%84-%ED%9D%94%EB%93%A0-19%EB%B2%88%EC%9D%98-%EB%A7%8C%EC%84%B8-464